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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석천암 석조불상군 - ▣백암산 백양사와 운문바위▣남덕유적지인 영감사▣장흥 천관사▣금절전사▣지리산 묘향바위▣지리산 공원동굴

by travel-tales-adventures 2025.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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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암 석조불상군,석천암 석조불상군 (서산)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백학봉과 백양사(장성백양사·백학봉)

 

▲ 백양사 뒤에 백학이 앉아 있는 모습을 닮은 백학봉이 견디고 있다.

 

장성 백양사 백학봉은 장성군 백암산 아래에 위치한 백양사와 백학봉 일대의 암벽 및 식생경관이 아름답고 2008년 명승 제38호로 지정되었다. 옛부터 8경의 하나로 꼽히고 있을 만큼 명명된 장소다. 백양사가 위치한 백암산은 내장산과 함께 단풍이 특히 유명하며 천연기념물 제153호의 ‘백양사 비자 나무 분포 북한지대’를 비롯해 1,500종 이상의 다양하고 풍부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어 자연자원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장성 백양사 백학봉의 가을

 

웅대한 모습을 드러낸 전남 장성의 백학봉. 산 중복에 매달려 있는 약사암에 비추어 보면, 암벽의 거대한 규모가 실감이 나온다

 

백학봉의 설경 장성 백양사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노령산맥에 해발 741m의 백봉봉은 동쪽에 백양사를 안고 있다. 백학봉 일대는 아름다운 풍경을 소중히 여겨 옛날부터 경승지로서 조선 팔경의 하나로 알려져 왔지만, 1971년 내장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백양사로 향하는 길은 아름답게 오크와 단풍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사계절의 아름다운 풍경에 관광객의 발이 멈추지 않는 곳이다. 계곡의 풍부한 수역은 주변의 나무를 풍부하게 키우는 환경을 만들고, 겨울에는 온화한 체감을 느끼게 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체온을 느끼게 한다. 표 매장 앞에서 시작된 숲은 백양사를 둘러싸고 백학봉 일대를 가득 채우고 있다.

 

백양사 1주문 일주문은 경내에 들어가는 것을 알리는 최초의 문이다. 기둥이 일렬로 되어 있다고 해서 일주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백양사는 2층 높이의 부드러운 크기 때문에 네 귀에 보조 기둥이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백양사 1주문 백암산 고불 총림 백양사 장성 백양사 백봉봉은 장성군 백암산에 위치한 백양사와 백봉봉의 일대로 백양사 대웅전과 쌍계로에서 바라보는 백학봉의 암벽과 식생경관이 매우 아름답고, 옛날부터 8경의 하나로 꼽혔을 정도로 이름이 붙여졌다. 백양사가 위치한 백암산은 내장산과 함께 단풍이 특히 유명하며 천연기념물 제153호의 ‘백양사 비자 나무 분포 북한지대’를 비롯해 1,500종 이상의 다양하고 풍부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어 자연자원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백양사는 백양사 창건의 역사를 전하는 정도 전의 정토사 교관을 비롯해 목은 이색, 우라긴 정몽주, 하소김 인후, 사암 박승, 면안정 성승 등 고려말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은 유명인들이 이곳을 탐방하고 명승지 특히 백양사 대웅전 기와 지붕과 조화를 이룬 백학봉과 쌍계로 앞 연못에 비치는 쌍계루와 백학봉의 모습은 탄성이 절에 나올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 지금도 많은 사진가가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출처 문화재청]

 

백양사로가는 길

 

백양사박물관학예연구실

 

백양사박물관에서 본 백학봉

 

바이양 역사 박물관

 

백양십이경의 하나인 닛코테이 매년 4월 초 파일에 불가의 시련법식이 진행되고 있다

 

부도전 일주문을 지나면 비자나무로 둘러싸인 곳에 오른쪽 언덕에 오르는 돌 계단이 보인다.

 

부도전 입구

 

백양사에서 주석이었던 역대 고승 18명의 샐리와 유골을 모신 석종형 부도와 비석을 모아 놓았다. 최상단에 6기, 중간단에 15기, 하단에 6기, 담 밖에 2기 등 총 29기의 부도와 비석이 있다. 망감당·묵담당·영월당·도허당 등의 부도와 김해대 선사·화히코 선사·양악 선사 등의 비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요대사 부도는 2002년 보물 제1346호로 지정되어 박물관 내부에 모셔졌다.

 

장성백양사 소요대사탑 백양사 입구에 위치한 부도전 내에 있으며 백양사의 주지를 역임한 소요대사의 묘탑이다. 소요대사는 13세에 백양사에서 불도에 입문해 부림에 대충을 배운 후 니시야마대사에게 신지를 각성시켜 백양사 조실에 있었다. 소요당 묘탑의 아름다움은 조선시대의 범종 형태를 모방한 전형적인 석종형 무도로, 이 형태의 무도는 9세기 말에 조성된 태화사지 12지상부도에서 시작된다.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에 와서 다양한 형태의 부도가 건립되었지만, 그 중에서 석종형의 부도를 좋아했다. 전체적인 모습이 범종과 같은 형태를 취하면서 세부 양식을 보이지는 않지만, 소요 대사의 묘탑은 범종 형태를 충실하게 따라 표면에 식물과 동물의 모양을 새긴 것은 매우 특이하며 역사적으로도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묘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156cm 규모의 탑으로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팔각형으로, 각면에는 풀꽃 모양이 새겨져 있고, 1면에만 거북이 동물이 엠보싱 가공되어 있다. 상면에는 하향 연꽃이 새겨져 있으며, 그 위에는 각형 1단이 탑 신부를 받고 있다.

 

대사부와 상륜부(용머리)

 

소요 대사부도 귀면 문양과 게 문양 탑신부는 종님으로, 전체적으로는 전통적인 범종의 모습처럼 하대·유곽·상대·용뉴를 표현하고 있다. 하단에는 2열의 돌출된 선으로 윤곽을 그려 그 안에는 게를 비롯한 8마리의 동물을 리얼하게 표현했다. 윤곽은 4면에 배치되었지만, 그 안에는 9개의 유두가 돌출했다.

 

소요대사 무술유두와 용문양 상대에게는 2행의 돌출한 선이 있어, 문양이 엠보스 가공되고 있다. 상면에는 아래를 향한 연꽃이 새겨졌고, 하대와 유곽 사이에는 모두 4마리의 용이 새겨졌다.

 

전면에는 액자의 형태를 새겨, 그 안에 逍遙堂라고 새겨져 소요대사의 부도임을 밝히고 있다. 상륜부는 4마리의 용두가 석종을 잡고, 그 사이에는 구름 모양을 새기고 그 위에 보석을 올렸다. 소요대사탑은 백양사 이외에도 담양룡 히로시와 지이산 연곡사에도 있다. 이 중 구례연곡사 소요대사탑(보물 제154호)은 탑신부에 새겨진 문장에 의해 조선 효종 원년(1650)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백양사 소요대사탑도 소요대사가 입적한 시기와 구례연곡사 소요대사탑의 건립연대 등에서 보고 1650년을 건립의 하한으로 볼 수 있다. 범종의 세부 양식이 탑에 표현된 드문 사례이며, 주인공이 확실하고 건립연대를 알고 탑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자료 출처: 문화재청 문화 유산 정보)

 

창성백양사와 백화봉(Changseong Baiyang Temple and Baihe Peak)

 

장성 백양사의 전망 백암산에 위치한 백양사는 백제무왕 33년(632) 여환이 처음 지어진 절이다. 이후 몇번이나 재건되거나 이름이 바뀌기도 했지만, 지금의 백양사라는 이름은 조선조 7년(1574) 환양이 절을 재건한 이후부터다. 환양이 절에 있으면서 매일 호화경을 읽을 때 흰 양이 듣는 소리를 듣고 모여오는 경우가 많아지면 절의 이름을 백양사로 고쳤다고 한다. 백양사의 산내암으로는 약사암과 영천굴, 1351년에 창건된 청류암, 1981년에 지어진 수도도량의 수외암, 천진암 등이 있다.

 

약천소와 쌍계로 뒤편 백봉봉과 맞춰 절경을 만든다 백양사 박물관을 비롯하여 무도전, 약천소, 쌍계루, 백양사 대웅전에 이르기까지 숲과 약수천이 함께 한다. 바위가 우뚝 솟은 백학봉은 좌우로 계곡을 만들고, 그 계곡에서 산이 내뿜는 물이 백양사를 향해 흐른다. 야청천서는 백양사 쌍계를 끌어당겨 하늘색에 또 하나의 쌍계를 세운다. 지나갈 수 없는 풍경은 다리를 표지 다리에 끌어당겨 약천소와 雙溪樓, 白鶴峰을 배경으로 한 폭의 사진을 남긴다. 쌍계는 좌우 계곡이 끝나는 지점에 세운 누각이다. 이 누각은 고려말에 홍수로 약천소 제방과 함께 무너지지 않게 다시 중창했지만 1950년 다시 사라져 버렸지만 나머지 1985년 다시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누각 내부에는 우라긴 선생님의 기제인 曪溪樓 편액이 걸려 있다. 1370년에 무너진 뒤 1377년에 복구되어 이 과정에 정도 전·이색 등이 기문을 남겼다. 특히 1381년에 만들어진 이색의 ‘백암산 정토사 쌍둥이’에 따르면, 여기에서 양계곡의 물이 합쳐지기 때문에 ‘쌍계루’로 명명된 것을 알 수 있다.

 

쌍계루 편액 <기제 雙溪樓 구시 이마미 시라노 스님 (구시 금견 시라이와 카츠) 淸起樓名始重(시미즈 원명시 중) 부산산산 보라색(연광표묘모산자) 히사카타 인간 번열성(구향 인간번 열뇌)/카이 며칠 공군 등 지금 시를 써주고 듣는 백암의 스님을 만나면, /붓을 잡고 사고에 잠기면 재능 없음이 부끄러워한다. 시미즈가 누각 세워, 지금은 그 이름이 무겁고, / 나무옹이 고문을 세워 더욱 가치가 있네. 안개 빛은 산이 붉고 달빛이 배회하기 때문에 가을의 물이 깨끗합니다. 오랜만에 인간사의 번뇌에 시달렸지만,/어떤 일복을 떨고 당신과 함께 오르는가. 이 외에도 많은 편액이 걸려 있지만, 모두 포는 선생님의 시를 식힌 것이다.

 

백양사 쌍계환 사천왕문을 들어서 대웅전, 극락전, 정류암, 관음전을 둘러봤다. 백양사는 1400여년 전 백제시대의 고찰로 주변의 뛰어난 경관으로 잘 알려진 사원이다. 산내에는 10여개의 암자가 있어 고려시대부터 정진도량으로 명명된 시문이 있는 경우도 있다. 백암사, 정토사 등의 이름으로 전해진 백양사는 신라 때가 있는 승려가 처음으로 절을 지어 살고 이름을 백암사로 했다. 정도 전인 ‘백암산 정토사 교류기(白巖山淨土寺橋樓記)’에 ‘장선군의 북쪽 30리에 있는데 그 이름을 백암이라고 하며 암석이 모두 흰색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주변은 백학봉을 중심축으로 하며, 쌍계를 종점으로 펼치고 있는 비자나무 숲과 많은 오크와 단풍은 사계절마다 제대로 새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약 수천

 

약 수천을 건너면 백양사 경내에 들어간다

 

사천왕문과 종무소

 

만암대 종사 고불 총림도 장비 다리를 건너 사천 왕문으로 향하는 도중 종무소 담 앞 조계정 중앙종회가 백양사 고불총림 지정을 해제했다. 총림이란 어느 도량에 대중이 많이 모여 살면서 선원, 승가대학(또는 승가대학원), 율원(또는 율학승가대학원), 염불원 등의 수행기관 및 교육기관을 갖춘 규격이 있는 승가공동체를 의미한다. 백양사는 지난 기원대승님을 방장으로 쫓아 총림으로 지정됐다. 총림이 해제되면 크게 두 가지가 바뀐다. 우선 방장의 직위가 사라지게 된다. 두 번째는 주지순에 대한 선출권이 지금까지는 방장에 있었지만, 지금은 백양사 본사 내의 사찰 주지스님이 참가하는 야마나카 선거로 정해진다고 한다.

 

백양사 경내교를 건너는 백봉봉의 단풍

 

【백양사 탐방 코스】 종무소··▶사천왕문··▶(왼쪽)··▶포교국(단플관)··▶범종각··▶해운각··▶청운당··▶교육관··▶(오른쪽)··▶ 노석상반··▶명부전··▶극악보전··▶진영각

 

안코쿠선(포교국:탐플관)◀・・・사천왕문・・・▶종무소 백양사 사천왕문은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백양사에 있는 조선시대 불전. 정면 3간측 2사이의 날개공식 맞춤 지붕의 18평 건물로 전라남도 타입 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문교관은 사원 통문에서 개방되어 좌우의 틈은 시천왕상을 안치했다. 1945년 복원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 사천왕을 모시는 건물로 익공식과 주심포식을 사용한 절충식 건축물이다.

 

사찰통문에서 쓰여 별명 ‘봉황문’이다. 사원 입구에 이런 천왕문을 세운 이유는 사원을 외호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이 수호신들에 의해 모든 악귀가 물러난 청정도량이라는 신성관념을 갖게 하는 의미도 있고, 일심을 의미하는 한 주문을 거쳐 사천왕문에서 미즈미산 중복의 청정도량이다. 사천왕은 수미산의 중복으로부터 동서남북의 4방향을 지키고, 불법수호와 인간선악의 관찰, 그리고 사부대중의 보호가 그 임무였다. 동방지국천왕은 청색으로 칼을, 남방증장천왕은 붉은색으로 용을, 서방광목광목천왕은 백색으로 탑을, 북방다문천왕은 흑색으로 비파를 쥐고 있다. 그리고 푹신하고 나온 외친 눈, 가득 오른 검은 눈썹, 크게 열린 붉은 입술 등 공포를 주는 얼굴에 몸에는 갑옷을 걸고 손에는 검, 보탑, 창, 비퍼 등을 들고 다리에는 악마를 밟고 있는 모습에 묘사되어 취해 있다.

 

광무천왕 두오먼천왕

 

지구의 왕 백양사 사천왕상, 1917, 전라남도 문화재 제44호, 백양사 사천왕문

 

안송국(우라바시국 탐플관)◀・・・해운각◀・・・범정각・・・

 

해운각◀・・・범정각・・・▶만셀・・・・

 

종종각 뒷면에 사천왕문과 포교국(단플관)의 일부가 보인다 1937년에 조성된 梵鐘樓는 2층짜리 누각으로 사물인 범종, 호고(法高), 목어, 운판이 걸려 있다. 그 역할은 중생 제도를 위한 수행자의 격려의 의미로 상징되어 온 것이 점차 그 의미가 지옥 중생 구제로 확대되고, 종에 새겨진 인물도 처음에는 하늘의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상에서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로 변화하고 있다. 범종에는 마치 젖꼭지 형태로 9개의 유두가 있는 중생계를 상징한다. 호고(法鼓)는 홍고(弘鼓)라고도 불리며 줄어 북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말씀이 잠자는 중생의 마음을 울려 깨닫게 한다는 의미에서 음양의 조화를 도모하고, 작은 막대기 두 개로 마음의 마음을 그려 친다고 한다. 구름판은 구름처럼 생긴 철판을 말하지만, 공중으로 날아가는 중생과 허공을 감도는 영혼을 달래기 위해 친다고 한다. 목어는 나무로 만든 고기라는 의미로, 이것은 수중의 평생을 위해 친다고 하며, 수중고기는 수면 중에도 눈을 감지하지 않기 때문에, 수행을 강조하기 위한 법구로서 사용된다.

 

범정각

 

종무소에서 본 백학봉과 비자 나무 숲

 

(좌전부터) 정은당··▶해운각··▶범정각(왼쪽) (오른쪽 앞에서)

 

설선당◀・・・▶종무소 뒤에 비자나무 숲과 백봉봉이 보인다

 

우라바시국(단풀관) 측◀・・・▶(우전부터) 범종각・・・해운각・・・청운당

 

백양사 우라바시국(사원관) 사천왕문에 들어가 왼쪽에 있는 포교국은 템플스테이를 관할하는 곳이다. 사찰에 관해서 신경이 쓰이는 것이 있으면, 포교국을 찾아 들어 보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정보도 얻고 차담도 나눌 수 있는 곳이므로, 사랑방의 역할을 확실히 하고 있다

 

우라쿄쿠쿠(단풀관) 전방의 약 수천의 다각각 다향각은 백양사 안에 있는 유일한 가게로 불교용품과 각종 차, 다구, 불교미술품을 판매하고 있다. 미술품과 차를 주로 판매하고 있으며, 내부에서 보이차 등 귀중한 차를 마실 수 있다.

 

범정각 주변 ◀・・・종종루(뒤쪽에 설성당)과 백학봉・・・(전방에서) 포교국(탐플관)

 

해운각

 

1918년 만암선사가 건립한 청운당

 

해운각과 청운당 사이 연못

 

중화당과 염화원

 

얀부위안

 

교육관에서 본 중화당 앞

 

중화당 뒤

 

중화당에서 본 교육관

 

중화당 뒤편 교육관 공양간이 함께

 

노적 산방과 중화당(오른쪽)

 

老石山房(오이시 야마보) 교육관과 중화당 사이의 왼쪽에

 

[상] 노석산방・・・화엄전・・・명부전・・・극악보전 [중앙] 벽안당・・・교육관・・・중화전・・・청운당・・・형적전・・・해운각・・・우팔

 

화엄전과 향적당 정면에 명부전과 멀리 대웅전이 보인다

 

화엄전 불법신인 비로자나블을 주불상으로 모시고 있다

 

홍콩 전시회

 

향적전 카이에(카이오카) 김규진(김규진)

 

교육관 뒤편의 벽안당 높은 석구대 위에 정면 3 사이, 측면 2 사이의 지붕 건물로 승려들이 들르는 요사채

 

우화각◀・・・해운각◀・・・고불매・・・・▶향적전

 

장성 백양사 고불매(천연기념물 제486호)는 우팔의 우측에 있는 나무 [고불매···▶명부전···▶극악보전] 이 매화나무의 고목은 매년 3월 말 무렵 참핑크 꽃을 피우는 홍매화 씨로 꽃의 색이 아름답고 향기가 풍기는 산사의 기분을 올린다. 아래에서 세 가지로 나뉘는 줄기 성장은 고목의 품위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모양도 깔끔하고 우메모토의 기품이 살아있다. 대개 1700년경부터 스님들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고백양사 앞마당에 몇 개의 매화나무를 심어 자랐다고 한다. 1863년의 사원을 이쪽으로 옮겼을 때, 그때까지 살아남은 홍매화와 흰 매화 한 개씩도 함께 이식했다. 그러나 흰 매화는 죽어 버려 지금의 홍매화 하나만 살아남았다. 1947년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을 기리려는 의미로 백양사 고불총림을 결성해 고불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게 된 나무로 역사성과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 [출처 문화재청]

 

백양사 명부전(명부전), 명부전은 1896년에 건립된 것으로, 정면 5간, 측면 3사이의 중첩 대합 지붕의 건물로, 각 주두마다 공포가 장식되어 있다. 내부는 우물 바닥과 우물 천장으로 되어 있다. 명부전은 시왕전이라고도 불리며, 전역에는 흙으로 만들어진 시왕과 목조지장 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지장보살과 주왕을 모시는 건물이다. 지장보살은 원래 불의 반열에 오른 보살이지만, 지옥에 있는 모든 생애를 구제하기 전에는 불이 되지 않는다고 하고, 지옥에서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이다. 그런 이유로 보살이지만 관을 사용하지 않고, 손에 궤도나 법륜을 가지고 있는 경우로 표현된다. 백양사 명부전에는 지장보살 이외에 지옥을 다스리는 십왕상이 함께 봉안되어 있지만, 각자의 지옥을 다스리고 사람의 일생의 선악을 심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백양사 명부전 지하에 납골당인 영각당을 지어 2000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나부 홀의 도시 왕의 삼지장 동상 (하데스 홀의 십왕의 삼지장 동상)

 

시왕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높이 150cm, 지옥 사자와 판관은 높이 140cm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과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 그리고 시왕(十王)과 사자(사자), 판관(판관)이 모셔져 있다. 지장보살은 높이 110cm로 폭 77cm로 앉아 있는 모습이며 도명과 무독귀왕은 입상으로 높이 144cm이다.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은 목조이며, 시왕상은 소조상으로, 만암스님이 중창불사를 할 때 조성한 것이다. 지장보살은 승려의 머리 모양을 갖고 얼굴 하구가 부풀어 목이 거의 없는 모습이다. 손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아미타인 수인을 맺고 있다.

 

「명부전」에서 본 「대웅전」

 

대웅전에서 본 칠성전·진영각, 극악보전, 명부전

 

전남형 문화재 제32호인 극악보전.

 

백양사 극악보전(전라남도형 문화재 제32호) 극악보전(正惂寶殿) 조상 7년(1574년) 스님 환영이 조성됐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하지 않다. 대체적으로 조선영·정조대에 걸치는 시기의 건물이라고 보고 있다. 현재 전라남도형 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아래의 석조기단 위에 주강을 놓고 배류처리한 환기둥을 세워 기본구조를 마련하였다. 건축 구조상 다포식 건물에 속해 건물 내부는 우물 천장, 우물 바닥을 깔았다. 조선사찰사료에 따르면 백양사 극락전 불양계서의 문정왕후빈향 축열서라는 기록으로 당시 건물을 세우는데 중종(재위 ) 비인문 정왕후가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판에 극참관이라고 쓰여져 있지만, 동국 진체로 된다. 전면 3간·횡면 4간 규모로 지붕의 횡면이 사람인 형태를 한 합쳐진 지붕집이다. 지붕을 지지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 양식이다. 건물 내부에는 담담한 기법으로 처리한 단색 벽화가 있다. 적응 지붕을 가진 건물에서 자주 사용하지 않는 다 거품 양식으로 절충하고 있는 점이 드물다. [출처 문화재청]

 

[출처 문화재청]

 

眞影閣, 칠성전. 대부분의 진영각과 칠성전은 독자적인 건물을 가지고 있지만 백양사의 경우에는 하나의 건물로 연결되어 있다. 정면 4 사이, 측면 3 사이의 넘치는 지붕 건물로 진영각이 정면 3 사이, 칠성전이 1 사이를 차지하고 있다.

 

백양사 진영각에 모셔진 여환, 중연, 각각 스님의 진영

 

진영각은 사찰 조사 및 실적이 높은 고승진영을 모시는 곳으로 백양사 진영각에는 개척자인 여환 선사를 중심으로 중련 선사와 각진국사 및 30여분의 고승 진영을 모시고 있다. 되찾은 조사진영은 송담성의 사진진영, 취운당 대통령 선거진영, 보경당 대통령 선거진영, 김해 대통령 선거진영, 대공덕주 학산당 진영, 경호당 대통령 선거진영, 경기당 대통령 선거진영이다. 이들 진영은 현재 사찰에서 따로 보관 중이며 조사 전에는 최근 그려진 조사진영이 29점 봉안돼 있다. 만암스님의 중추시에 그려진 조사진영은 모두 같은 사람이 그려 얼굴의 색이나 표정, 머리 위 등을 다르게 그려 개인의 특성이 나타나지만 구도와 의복의 처리는 비슷하며 특히 앉은 자세와 바닥에 펼쳐진 옷의 주름은 매우 어색하다. 만암수님 당시 대중창을 하면서 많은 조사진영을 새롭게 조성해 봉안했다. 여환조사와 중연선사, 각진국사 등 세분의 개산조와 대중창주의 진영이 봉안되고 있으며, 별로 도의영당에는 한국 선종의 시조인 도의국사와 그 문손들의 진영을 봉안했다.

 

진영각 칠성정 중 하나만 칠성정이 활용

 

칠성당(지우산) 금육수(금육수)

 

백양사 칠성전 칠성상 지성광여레와 시치하라성 대웅전 앞에 조사전과 한 건물에서 모셔진 전각이 칠성전이다. 칠성전에는 칠성광 여래와 닛코 보살, 월광 보살, 나나하라 성군이 조각되어 모셔져 있다. 본존은 최근의 작품으로 추정되지만, 칠성과 닛코, 월광 두 개의 보살은 소조상으로 높이가 약 80cm 내외이지만, 1880년의 작품이다. 이 시치하라 성군은 원래 고종 17년(1880)의 경진년에 왕의 이름으로 조성되어 운문암에 봉안했다. 이후 여행순 사건이 일어나자 운문암으로 위험을 느끼고 여기로 옮겨 봉안했다고 한다. 나나하라 성군은 모두 문관의 복장을 한 모습으로 머리 위에 하얀 별이 붙어 있어 검은 단이 둘러싸인 빨강 또는 파랑 상의와 황색, 파랑 속을 입고 있다. 닛코 보살과 달빛 보살은 보살의 모습에 왕관형 관을 사용하고 있다. 머리 위에 햇빛 보살은 붉은 해를 달빛 보살은 노란 달을 매달았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칠성각, 진영전, 극악보전, 명부전이 위치하고 있다.

 

대웅전의 측면과 뒷면

 

文水菩薩◀・・・석가모니불・・・・・・ 불전 중에는 본존인 석가모니 불이 중앙에, 협시의 문수보살과 보살보살이 좌우에 있어 백양사의 역사를 담은 스미단이 두드러진다. 아안 코소프산과 시자상 2체, 나한산 23체, 독성상, 인왕상 2체, 또 다른 석가불상 등이 봉안되고 있다. 이들 불상의 뒤편에는 1922년에 금영승려가 그린 영산 회상도와 제석천룡탄화, 1926년 제작된 독성탄파와 1988년 그린 8폭의 팔상탕 등의 불화가 걸려 있다.

 

불전 중에는 본존인 석가모니 불이 중앙에, 협시의 문수보살과 보살보살이 좌우에 있어 백양사의 역사를 담은 스미단이 두드러진다. 아안 코소프산과 시자상 2체, 나한산 23체, 독성상, 인왕상 2체, 또 다른 석가불상 등이 봉안되고 있다. 이들 불상의 뒤편에는 1922년에 금진승이 그린 영산 회상도와 제석천룡 탬파, 1926년에 제작된 독성 탬파와 1988년에 그려진 8폭의 팔상 탄 등의 불화가 걸려 있다. 대웅전 후불환은 중앙에 석가모니 불을 그리고 6대 보살과 쓰촨왕, 10대 제자가 3단으로 나뉘어 그려진 영상 회상도이다. 긴 종이에 채색을 했지만 가로 320cm, 세로 350cm다. 왼쪽 하단에 실린 부화기에 따르면, 화기 2949년(1922)에 금붕어의 금영과 재명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불화는 전체적으로 녹색과 빨강의 색조로, 조금 옷자락과 먼 하늘의 표현에 청록색을 사용했다. 중앙의 석가모니는 꽃무늬가 달린 빨간색 법의를 입고 받침대 위에 앉은 모습으로 둥근 얼굴이다. 주위의 성중은 3단으로 구성되어 있어 가장 하단이 가장 크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사이즈로 배치해 점점 멀리 보이게 했다. 맨 아래 양단에 위치한 2개의 천왕은 갑옷을 입고 매우 튼튼하게 그려져 있지만 전체적인 모양과 손의 모습 등이 어색한 편이다. 1926년까지 백양사를 증축할 때 이 불화를 조성했기 때문에 채색이나 구름 등의 표현으로 20세기 초기 작품의 특성을 볼 수 있다.

 

팔상환자는 각각의 크기가 106cm×114cm, 104cm×114cm, 104cm×114cm이다. 에 이 팔상 탄화 3점을 반환되어 현재 백양사가 소장하고 있다. 원래 8폭이었던 것을 5폭은 도난당해 3점만 남은 것으로 『투율 의상』, 『4문 유모상』, 『아리가미 출가상』이다. 모두 실크에 채색된 것으로 연대가 명시된 화기는 없다. 화면 내에는 복수의 장면이 그려져 있지만, 각 도면의 내용의 설명이 빨간색 사각형에 검은 문자로 쓰여져 있다. 모두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부감법을 사용하여 각 이야기의 내용을 분할된 공간 속에 그렸다. 작품의 색과 표현 형식으로 보고 19세기 작품으로 보인다. 현재 대웅전에는 1988년에 그려진 팔상 탬파가 왼쪽에 봉안되고 있지만, 이 팔상 탬파와는 표현 형식이 다르다. 오백라 한상 에 꽃순쌍봉사의 오백나한전이 무너져 나하전 내의 불상을 백양사로 옮겨왔다. 석조나하좌상 241구, 목조나하좌상 200구, 소조나한좌상 32구 및 석조사자상 3구, 목조수문장상 2구 등 모두 478구였다. 그 중 대부분이 없어져 남은 7점을 대웅전향 좌측벽에 모시고 있지만 모두 석조다. 높이 40cm 안팎으로 표정과 자세가 매우 독특하고 여려한 조각 방식으로 보고 고려 시대의 작품이라고 보고 있다.

 

백양사 대웅전 16 16나한은 현세에서 정법을 지키는 16명의 아라한을 가리키는 것으로, 백양사 대웅전 16나한상은 1925년 공시호가 조성한 것으로 현재 대웅전에 봉안되고 있다. 각 나한은 하나의 나무로 조각되어 옷과 표정이 다르게 처리되었습니다. 얼굴의 주름과 목의 힘줄, 웃는 얼굴의 표정과 빠진 지금까지 세세하게 묘사해, 옷자락에 실크 무늬까지 섬세하게 그려 넣은 좋은 작품이다. 대웅전 신중탄화는 대웅전의 향우측 정면벽에 걸려 있지만 옆 210cm, 세로 290cm로 비단으로 물들인 그림이다. 이 불화는 대웅전후 불당화와 함께 1922년에 그려진 것으로, 후불 연화보다 녹색의 사용을 줄여 적색을 많이 사용해 그렸다. 일반적인 신중탄화와 달리 범천과 제석천, 위태천왕 등이 상단에 흩어져 크게 그려져 있으며, 많은 신중이 약 4개의 단으로 나뉘어 배치되어 있다. 화면 하단에서 그 크기가 상단으로 올라가면서 급격히 작아져 거리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김기는 봉영이다. 독성 탬파는 가로 130cm, 세로 158cm의 크기로 긴 종이에 채색하여 그렸다. 1926년 대웅전 후 불당화를 그린 금붕어 봉영과 축사춘화가 제작했다. 폭포가 흘러내리는 험한 이와야마가 가득 들어간 언덕에 두 명의 동자를 안은 나반정자가 앉아 있다. 나반정자는 붉은 넵리 모양의 두광을 가지고 있으며, 턱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눈썹, 그레날트 수염이 표현되고 있다. 독성 얼굴은 흐린 눈 때문에 이국적인 느낌을줍니다. 손에는 긴 석고와 소금기둥을 가지고 있으며, 언덕 사이에 아름다운 꽃과 브로초 등이 그려져 있다. 조사가 앉은 언덕에는 낡은 소나무가 몇 개 놓여져 있지만, 언덕을 흐르는 반복선과 소나무 가지의 같은 형태가 일정한 방향으로 계속 그려져 모식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나반정자는 독성이라고도 불리며,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성인을 말함으로써 백양사의 나반정자상은 16나한상과 마찬가지로 1925년 이만이가 조성했다.

 

작은 조상으로 높이 42cm, 가로 42cm, 세로 33cm 크기이다. 16나한상과 그 표현방식이 매우 비슷하다.

 

대웅전 뒤편의 탑전의 팔층 석가사탑

 

비자 나무 숲과 흰 학봉 배경으로

 

팔층석가사탑(八層石家寺塔)

 

八層石家寺塔(八層釋迍舍利塔) 1925년에 조성된 석가사리탑은 대웅전 뒤에 우뚝 서 있다. 이 탑은 팔정도(깨달음과 열반으로 이어지는 8개의 길)을 상징하기 위해 팔각팔층으로 만들어진 석탑으로 내부에 부처님의 신진사리를 봉안했다. 특히 이 신신 샐리는 근대불교계의 지도자이며 민족대표 33명 중 한 명인 백룡성 스님이 비장하고 있었지만 스님의 소원으로 여기에 봉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각형의 대석 위에 연꽃모양으로 장식한 돌기둥 4개를 올려 기단부를 구성하였다. 톱신석과 옥개석은 아무 장식도 없고 다락방은 3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과주만을 싣고 장식했다.

 

팔각석가사탑 뒤편에 있는 고불선원

 

천년기념물 제153호의 백양사 비자나무숲

 

장성백양사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153호)은 대웅전 오른쪽에 숲 비자나무는 한국의 내장산 이남과 일본 등에서 자란다. 나무의 형태가 아름답고 관상용으로 많이 이용되고 과일은 구충제나 변비 치료제나 기름을 짜는데 사용된다. 백양사 비자 나무 분포 북한 지대는 전라남도 장성 백양사 주변에 810m에 이르는 비자 나무 5,000그루가 숲을 구성하고 있다. 이 숲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당시는 비자나무가 자라는 가장 북쪽에 있는 숲으로 그 가치가 인정되었지만, 현재는 이 지역보다 북쪽에 있는 내장산에서도 비자나무 숲이 발견되었다. 이 숲이 형성된 유래는 고려 고종(재위 ) 때 각선 국사가 당시 유일한 구충제였던 비자나무 열매로 가까운 마을을 구하기 위해 사원 주위에 심었다고 하며 실제로 1970년대까지도 스님들을 완수했다. 백양사 비자의 나무분포 북한지대는 한국의 조상들이 비자나무의 과실을 의약재료로 사용한 생활문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또한 비자나무가 자라는 북한계 지역에 있는 대표적인 숲이므로 식물분포학적 가치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맨셀 프론트

 

맨셀의 뒷면과 달리 우팔이라는 편액이 걸려 우화원은 정면 7칸 맞은편 지붕의 건물로 우화는 꽃이 피도록 쏟아졌다는 것으로 법화경 서물에서 보면 하늘에서 부처님이 설법하고 있는 곳에 만다라 꽃이 비처럼 우수로 쏟아졌다는 시가 있다.

 

우팔 내부

 

백양사는 한국삼십삼관음지 제10호로 지정 백양사에는 관음전은 없지만 산내 암자인 청류암의 관음전이 있어 관음성지로 지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청류암 관음전 청류암은 백양사에 소속된 암자로 고려충정왕 2년(1350)에 각성왕사가 세웠다. 여기 청량암은 마음을 깨끗한 맑은 물에 비해 맑고 청결한 심성으로 옥에 들어간다며 청량암으로 했다고 한다. 백양사 경내에 들어가 좌계곡을 건너 가파른 산길을 2㎞ 정도 오르면 청류암에 이른다. 청류암 중에는 관음전과 요사채가 있다. 관음전은 기단 위에 큰 기둥을 두고 두꺼운 원형 기둥을 세웠다. 지붕의 처마를 지지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들어진 공포는 새로운 날개 모양으로 짠 날개공 양식으로 장식되었고, 공포가 늘어난 부재의 끝에는 연꽃 봉오리를 얹었다.

 

스노우 자선 홀

 

설선당 설선당은 현재 주지스님이 기증하는 요사채로 승려가 수행되는 공간이므로 담과 대문에서 경계가 되고 있다. 땅에도 음식이 있다! 후난의 불교 성지 백양사 운문암 머리를 깎고 불교의 승려가 되면 무엇이 좋은 것일까? 전국 명산의 건강하고 경치가 좋은 곳에서, 일철 또는 몇 년씩 살아 볼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길을 깨면 좋지만 망가지지 않아도 한세상 태어나 명산의 명당에 살아가는 것은 남은 장사가 아닌가. 산마다 암자마다 기운이 다르다. 풍광이 다른 것은 당연하지만, 그 자리에서 오르는 현지가 다르다는 것이 포인트다. 예를 들어, 비타민과 같은 토양이 있고 단백질이 오르는 토양이 있으며 일부 토양은 칼슘에 해당합니다. 칼슘이 부족할 수 있다. 이럴 때는 칼슘이 많은 땅에 가서 몇 년 살아보면 보충이 된다. 타이밍마다 부족한 기운이 다를 수 있습니다. 공부 정도에 따라 요구되는 에너지가 있지만 이것이 다르다. 특히 사람의 기질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성질이 가파른 사람들은 물이 둘러싸거나 호수가 앞에 보이는 물기가 풍부한 땅에서 살아보면 자연스럽게 완급조절이 된다. 반대로 내성적이고 조용한 스타일은 바위가 험하게 돌출된 정도로 살면 보강이 된다. 안국선원의 수려·수도사는 2728세경에 “어느 소식(불가로 말하는 돈오, 즉 갑자기 깨달음)”한 것을 알고 있다. 불가로 말하는 한 뉴스를 하게 되면 마음이 크게 이완한 상태에 들어간다. 인생이 주는 압박감과 긴장에서 벗어나는 상태다. 긴장은 인생을 살면서 따로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하게 된다. 문제는 긴장, 즉 긴장입니다. 이완이 매우 어렵다. 말로는 긴장을 풀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말처럼 쉽게 해방됩니까? 어떻게 하면 긴장을 푸는 과정이 길을 닦는 과정이다. 제대로 된 이완은 어느 소식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처럼 이완이 되면 막혀 있던 몸의 경락도 모두 열린다. 긴장을 하면 경락이 막히고 굳어진다. 막힌 것이 길어지면 모두 병으로 진전한다.

 

이완이 되면 이 막힌 나디(Nadi·통로)가 모두 열린다. 경락이 열리면 그 자리의 기운이 모두 몸으로 느껴진다. 또, 상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기운도 모두 느껴진다. 기경팔맥이 열리는 이완이 되면 수아일체의 상태가 된다. 이러한 상태로 아카야마의 사원과 명당을 둘러보면 그 흔적의 맛이 제대로 느껴진다. "흙의 맛"이 인생의 진미 맛! 이것이 가장 진미다. 미슐랭 가이드가 식당의 음식 맛을 보고 별을 하나 주고 두 가지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자는 흙의 맛을 보고 다니는 사람이다. 문제는 필자가 한 소식을 못하고 제대로 깊은 맛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대략 알고 있지만, 아주 안쪽의 깊은 맛은 쉽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인생의 압박에서 벗어나지 않고 크게 쉬지 못했기 때문이다. 잠시 스블루스님과 가회동 안국선원으로 차를 가득 채우면서 지금까지 당신이 가본 토지에 대한 느낌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외국에도 건강한 강당이 많이 있나요?" “남 인도에 갔을 때 매우 드문 기운이 느껴지는 사원이 있었습니다. 스리랑감이라는 힌두교 사원입니다만, 강의 하류 지점인 삼각주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건축 구조도 드뭅니다. 칠중에 중복이 성벽에 둘러싸인 사원이었습니다. 그 사원의 방어가 나는 예외적으로 들어가게 했다. 외국인이라도 아마 머리카락을 깎은 스님이기 때문에 용서했던 것 같습니다. 7번째 방에 발을 디딘 순간, 발바닥에 그런 강력한 기운이 휙 들어왔습니다. 발바닥에는 샘천 구멍의 자리가 있습니다만, 이 혈좌로 뭉클하면서 기운이 강하게 들어왔습니다. 발바닥과 종아리를 통해 하반신에 들어오는 지역은 이때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아! 이것은 어떤 허한 기운인가」라고 주시하면서 기운으로 돌아오는 것을 바라봤지만, 매우 강력한 기운이었다. 옛날, 인도 사람들도 그 기운을 알고, 그곳을 특별한 장소에 숭배했던 것 같습니다. 조 선생님도 언제 시간이 되면 거기에 한번 가보자.

 

장작은 바위가 전혀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육산이다. 좌청룡의 백학봉과는 음양의 관계다. 한쪽이 강하면 한쪽은 이 강기를 받아들여 안아주는 것이 이에 맞는다. 둘 다 강하면 부딪친다. 토집봉 에너지가 최종적으로 떨어진 곳이 백양사의 극락전이다.

 

은문암에서 백학봉과 백양사가 한눈에

 

시문암염화실

 

시문암염화실 염화실은 절에서 조실스님이나 반장님이 살고 있는 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실스님과 반장님은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이며, 염화미소는 이 참선의 기원이 되는 고사이기 때문에 그 방을 염화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기타엔 마요오이오, 미나미엔 운문암」이라고 불리며, 속세를 떠나 조용히 불도를 닦는 방을 선방이라고 하고, 그 사원을 선원으로 하고, 그 장소를 전요바라고 한다. 옛부터 북마하영, 남운문으로 한반도 북측에서는 금강산 마하용선방, 남측은 백암산운문암선방으로, 운문암은 한국 최고의 선방으로 알려져 왔다.

 

윈먼 록 윈먼 록 크루

 

은문성원의 은문암(요방운문암)

 

샤오린 동굴(Xiaolin Cave) 운문암 법당

 

법정인 소림굴의 불상과 탄화

 

소림굴의 투말의 새로운 중단과 신중한 텅

 

청화가 처음 은문암에 들렀을 때 당시 수도였던 승려들이 머리가 긴 속가 사람이 오기 때문에 쿠션을 하나 내면서 "잠깐 앉아서 봐라"고 했다고 한다. 처음에 좌선 쿠션에 앉은 청화가 4시간을 제대로 앉아 있었다. 4시간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운문암의 스님들이 청화에 머리를 깎으자고 권유한 적이 있을 것이다.

 

영험이니까 높여 부른다. 영험한 명당터는 그 땅의 형상과 풍수도 중요하지만, 그 자리에 끓여 비추는 별의 각도가 어떤 것인지 중요하다. 대명당은 칠성이 끓는 곳이다. [출처] : 조용헌 강호 동양학자 :<조용헌의 영지순례> 땅에도 음식이 있다! 후난의 불교 성지 「백양사 운문암」의 나무/주간 조선(제2628호) 37. 남덕유산 영각사(靈覺寺) 합격기도발 명소… 문필봉헬진남덕 유산

 

영각사 입구 靈覺寺는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남덕유산의 밑단에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 해인사의 말사이자 신라 끝에 심광대사가 세웠다. 1993년 영각사 청조승이 영각사 극락전을 비그니 선방에 개원해 비그니스님이 10여명 참가 선정했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 절의 입구 바위에 붉은 글씨로 안패사가 새겨져 있다. 각은 보리(bodhi: 보리)의 신역(新譯)이다. 사물의 도리를 확실히 아는 것, 망설임으로부터 멀어 진리실상을 증득하는 것, 성불의 경지, 사과를 얻는 것 등을 의미한다. 고승교에서는 모든 불행의 원인을 번거로웠다. 번뇌를 끊고 삼혹(혹·업·고)을 끊는 경지를 뿔로 했다. 영각사 일주문으로 가는 길에 해운, 용월 선사의 부도 2기가 있다. 에이카쿠지에 들어가면, 고색 창연한 구광 가시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영각사의 부도는 6기가 전한다. 무도는 모두 이시무네형으로, 절의 입구에 있는 해운과 용월의 무도 2기만 주인을 확인할 수 있었고, 산길의 사분 스님의 부도는 주인을 확인할 수 없었다.

 

영각사 입구 「기아미타불」

 

텐노몬 밖에서 본 영각사 설경

 

구광루 측에서 본 천왕문

 

천왕문

 

영각사 텐노몬

 

천왕문 중에는 4대 천왕이 목각이 아닌 벽화로 그려져 있는 것이 다른 사원과는 다르다.

 

구광루와 극락전

 

구광루 2층 양광에 나오는 원형 창문이 드물고 유리로 창문을 마무리해 이질적이다.

 

구광루의 창호

 

구광루창호

 

구광루 앞·뒷면과 측면

 

구광루측

 

『화엄경』에 쓰여져 있는 것을… 부처님이 ‘화엄경’을 보광법당을 비롯해 일곱 곳에서 칠쟁 9회를 설법하고 중생을 교화되었다고 한다. 매회 설법될 때마다 부처는 먼저 모든 중생들에게 휘말려 그 빛이 비치면 백어로 광명을 내고 중생들에게 신앙을 내게 한 후 기쁨으로 설법되었다고 한다. 광광루라는 건물의 이름은 부처님이 9회 빛을 낸 사실에 연유했다. 따라서 구광루는 영각사가 화엄사임을 보여주는 건물입니다. (도교에서는 구광을 「깨끗하고 빛나는 물체」, 「9종의 광채의 빛」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구광루의 뒷면과 관음전

 

구광루의 굴뚝

 

관음전

 

관음전 옆에는 미타전이, 미타전 옆에는 수각이 있고, 그 후에 상당한 정원이 있다. 정원 뒤에는 한층 높게 설치되어 계단에 올라가면 김당의 화엄전과 왼쪽 후방에 삼성각이 위치한다.

 

각성과 미타전

 

관음전 강원으로 사용

 

구광루 옆 관음전

 

영각사 극락전

 

극악전 뒷벽화

 

해운승에 의해 1966년에 극악전이 복원되었다.

 

구광루 뒤편 극악전

 

대웅전격의 화엄전이 가장 높은 곳에 있습니다. 뒤편에 남덕유산의 정상이 올라도 보인다

 

장엄한 화려한 화엄전의 현관 아래에 여의사를 물고 있는 두 마리의 용두.

 

화엄전 전면 용두 꼬리는 법정에

 

화엄전 외벽 벽화

 

화엄전 꽃 육문

 

화엄전 꽃문

 

화엄전 내부 우측 벽면 용가단과 반야용 산탄화

 

화엄전 내부 우측 용가단 반야용선

 

화엄전 내부 좌벽면의 신중한 탄화

 

화엄전 내부 왼쪽 영가단 옆에 작은 부처님과 탕가도 있었다

 

화엄전 내부 좌벽면의 신중한 탄화

 

화엄전의 주름 봉황과 용두가 호위한다

 

영각사 화엄전 내부 전면 비와 사나 불과 좌우 문수 보살과 보살 보살

 

영각사는 화엄종의 맥을 계승하는 사원이다. 그래서 다른 사원처럼 대웅전은 없고 화낭전이 있다. 화엄경의 주불인 빌로자나블을 봉안한다는 의미에서 비노전, 그리고 화엄경 연화장의 세계가 대정적의 세계라는 의미로 대적광전이라고도 불린다. 영각사화엄전에는 비와자나블을 중심으로 한 삼신불을 봉안해 연화장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다.

 

화엄전 내의 동종

 

삼성각에서 바라본 화엄전의 뒷면

 

요사채와 삼성각

 

영각삼성각

 

데이비드 메이슨의 삼신 : 한국의 삼신과 산악 숭배의 전통의 책 속에 함양영각사 산신탄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국 산신탄 중 최고 걸작은 영각사 산신탄입니다..." 「영각사 산신테이네. 전체적인 구도는 화면의 절반 정도의 크기로 호랑이가 그려져 있어 그 호랑이를 타고 미카미가 앉아 있군요. 계진이란 모기나 파리 등을 쫓는 데 사용되는 총채와 같은 것이다. 삼론종에서는 8화의 바람으로 8미의 폐를 잃는 것을 말한다. 수행자가 마음의 번잡함을 떨어 뜨리는 데 사용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문제 중 하나입니다. 經卷은 불의 교법을 쓴 경과 율 등의 서적을 말한다. 삼신의 왼손에는 바쇼부키가 붙어 있다. 고대 소설 『니시유키』에 파초슨이 등장한다. 손오공은 파초선으로 악령을 퇴치했다. 호랑이의 채색은 황토색으로 채워, 그 가장자리 등에 백색으로 바른 후, 짧고 가는 조개로 머리를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영각사상신탄은 성은 나씨, 호수는 금암, 센보살천여가 제작했다. 천여는 15세에 출가해 센간지의 수암의 제자가 되어 17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1837년(헌종3) 불조 53명을 도금하여 팔상전과 원통각을 보수, 단청했다. 1878년 심묘사에서 개금할 때 85세의 나이로 500마을을 걸어 불사했다고 한다. 청련암(青蓮庵)에서 법정 68세에 입적했다. ◆한국동란과 야마신카쿠 「영각사 연혁을 보았을 때, 영각사와 미카미와의 연기설이 나왔어요」 "무슨?" “1770년이니까 조선영조 46년, 당시 영각사 상언승려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내가 점령한 곳에 장경각을 세우라고 지시합니다. 화엄경」 「호망경」 「천지 하치요경」 「양친은중경」 등 무려 3481장이 소실된데 다행히 야마카미카쿠는 피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삼성각

 

함양용각사 산신탄 경상남도문화재 자료 제460호 함양영각사 삼성각에 봉안된 이 야마가미는 현재 사용측에서 별도 보관 중이다. 실크의 틈새가 넓은 명주를 토대 재료로 액자 모양으로 제작되고 있는 이 탬파의 화면에는 야마가미가 호랑이 등을 타고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려져 있으며, 뒷면에는 주로 쓰여진 전신 둔리 寶篋多羅尼가 있어, 다시 그 아래에는 문서된 그리고 이 산신탄은 조성 당시 화면을 액자에서 조금 비스듬하게 구획한 것이 후대에 오면서 프레임의 비틀림과 함께 화면이 좌측에 좀 더 비틀어져 있는 경우도 있다. 또 제작된 지 오랜 경과와 관리 소홀에 의해 화면 하부 호랑이 부분과 상부 향 우측 구름 부분의 개가 우울해 화면 상단에 흠집과 함께 채색의 변색이 진행된 상태다. 전체적인 구도는, 화면의 절반 정도의 크기로 그린 호랑이와 그 호랑이를 타고 앉은 야마신을 화면 중앙에 넓게 배치한 후, 화면 하부의 향좌측에 검을 세워 서 있는 신장상과 산신리측의 두명의 동자를 작게 파우치한 구도를 보이고 있다. 우측에 시선을 둔 정면관에 백발이 성숙한 산신은 상투관을 사용해 흰수염을 휘둘러 가슴을 드러낸 채 양발을 호랑이 등 위에 놓고 타고 있는 모습이다. 또 오른손은 가슴부위까지 들어가 지팡이를 잡고 있어 지팡이의 끝에는 구진과 석고를 묶어 설치하고 있으며 왼손은 아래로 내려 바쇼선을 잡고 있는 모양이다. 야마가미를 등에 구워 서 있는 호랑이는, 왕적과 같은 큰 눈과 입을 조금 넓혀 이를 드러낸 모습에 표범 무늬나 S자의 형태로 오른 꼬리 등으로부터, 마치 민화 속에 나오는 호랑이처럼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게다가 화면 하단의 고향 왼쪽 모서리에 검을 붙이고 떡을 하는 것으로 바티에 서 있는 키가 그려져 있어 매우 독특한 산신탄이기도 하다. 그리고 산신 배면의 양측에는 공양물을 지지한 텐도코·덴도 여자가 그려져 있고, 화면 뒷면에는 아무런 배경 묘사도 없이 여백으로 비워져 있지만, 화면 상단을 따라 빨강·녹·황색으로 채색된 구름과 화면상의 향우측 구름 사이에 소나무의 일부가 그려져 있다.

 

설채는 적색과 녹색을 중심으로 황토색과 삼청색 등으로 채색되고 있지만, 산신의 옷은 적색으로 하고, 전답은 녹색으로 채색하고, 옷의 문양은 어디서나 사각금박으로 처리되고 있다. 호랑이의 채색은 황토색으로 채우고, 그 인연 등에 흰색으로 바른 후, 짧고 얇은 식선으로 머리카락을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산신탄의 화기와 뒷면의 계시록 화면 하단 중앙에 주황색 냄새로 마련된 화기란에는 이 야마신탄이 도광 11년 신우 3월일에 조성해 봉안한 것과 작사가 천여함을 밝히고 있다. 또, 이 탕화의 뒷면에 부기되어 있는 명문에서는, 이 야마신탄이 방장산 미즈이안 고후고후조 조성과 袈裟佛事 속에 조성해, 히로야마 정패사의 야마신카쿠에 봉안한 것임을 더욱 상세히 천여는 19세기 초·중반에 전라도 센암사에서 활동한 화재로 수작의 불화를 많이 남기고 있지만, 특히 천여가 1847년에 제작한 센암지 산신탄은 영각사 산신탄과 유사하며, 해적에서 대화성이 있도록 수묵적으로 그려져 있다. 경상남도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야마신탄으로는 문화재자료 제243호인 산청정취암산신탄화와 제411호 난카이 용문사 산신탄이 있으며, 특히 1833년에 제작된 정취암산신탄화도 이 야마신탄과 같이 호랑이를 타고 있다. 다만 이 영각사 산신탄의 조성연대가 한층 더 2년 빠를 뿐 아니라 필력이나 안료 및 착색 등으로 한 단계 이상의 수준을 보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삼성각선신탄 현재 영각삼성각단화는 김위식 선생님 작품이다.

 

삼성각 칠성 탐파

 

삼성각의 칠성탄과 용왕탄

 

도사들도 한 사람 둘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양에 모여 있으면 도사끼리 서로 정보 교환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내가 북한의 묘향산에서 몇 년 살아봤는데 물산이 어떻게 중국에서 건너오는 도사들도 있었어!" 「고대산의 중대는 과연 명당이었기 때문에, 거기서 3개월만 살아도 건강을 제대로 받는다」 “금강산은 차력과 츠키지를 하는 고단자가 많았다. 금강산에서 내가 축지법을 쓰는 한 도사를 만나 감보나까지 몇 시간 만에 다녀왔다” 등 경험담을 서로 교환하는 장소로서 기능했다. 그러니까 터미널이라고 할 뿐이 아닌가.

 

삼성각 앞의 용각사 요사

 

삼성각 앞의 용각사 요사

 

▲ 용각사의 문필봉 기운을 상징하는 구광루. 불경을 내세워 목판을 보관하고 있던 곳이다.

 

▲흙이 좋은 곳은 맛도 좋다. 용각사의 물은 부드럽고 맛이 좋다. 달필본 아래에서 불경을 찍다 그러나 아무리 명당에서도 역사의 참화를 완전히 피해서는 안 된다. 6·25 전쟁과 파르티산 토벌 때 영각사의 많은 건물이 화재로 사라졌다. 유일하게 남은 건물이 이마데라 앞에 서 있는 구광 가시다. 시카만 색의 목조 2층 건물이다. 목조 건물이 2층에 지어진 경우는 드물다. 이 광광루는 처음 보는 순간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건물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는다. 목조 건물로서 고풍이 어려워지고 있지만, 어쩐지 신식감도 묻혀있다. 덕일 주지스님께 물어보면 1911년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상량문에 「개국 520년」이라고 써 있습니다. 「개국」이라는 문자를 당시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개국이란 조선왕조개국 520년이라는 의미입니다. 1910년에 일제와 병합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상양문에 개국이라는 문자를 삽입한 배경에는 당시 영각사 승려들의 자존심과 항일정신이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구광루를 지은 것도 영각사의 승려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용각사의 문필봉오라를 상징하는 건물은 현재 구광루입니다. 이 건물의 용도는 불경을 내세워 목판을 보관하는 용도였다고 한다. 출판과 도서관의 기능을 하기 위한 건물이었다. 영각사의 스님들이 보고 절대 전후에 문필봉이 포진한 곳에 책을 내놓는 건물을 세우는 것이 여러가지 합리적이라고 본 것이다. 스님이므로, 먼저 대석학이었던 술파 상언이 영각사에 장경각을 세운 전통을 계승한 건물이기도 했다. 용각사의 땅에서 또 다른 눈을 돌리는 것은 물입니다. 경내의 사각석에 물이 철철 넘친다. 나는 사원에 가서 물의 맛을 조심스럽게 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맛이 좋고 도통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은 매일 먹어야 하는 액체입니다. 각종 미네랄이 많이 들어있는 물을 마시고 건강이 유지되지 않으면 길을 닦는다. 이 용각사 물은 부드럽고 맛이 좋다. 퀄리티가 있는 인생이란 좋은 물을 먹고 좋은 공기를 마시는 것이다. 용각사 물을 매일 마시면 이것도 멋진 일이다.

 

주지스님과 인사를 하고 영각사 정문을 나오는데 앞으로 날카로운 바위봉이 보인다. 츠구봉이라고 부릅니다라는 대답이다. 산인들은 이 암봉을 칼끝봉이라고 부른다. 이 투구봉을 비롯해 월봉, 거망산, 황석산의 1000m급 영봉들이 용의 등근처럼 이어진다. 전신신령적인 영봉으로 둘러싸인 함양영각사. 그 영봉들에 머물고 있는 산신령이 나에게 말을 건넨다. "왜 지금 산에 왔어? 지금도 늦지 않았다" [출처] : 조용헌 강호동 학자 : <조용헌의 영지순례> 37. 문필봉 포진한 남덕유산 영각사 / 주간조선(제2632호), 복과 지혜의 양손에 붙잡은 천관보살이 머무는 장흥천관사

 

한자로 지제산으로 음역됐다. 한자의 지제는 산스크리트어의 cetiya를 중국어 발음으로 음사한 것이다. 중국 동남부에 있는 지제산이 한국에 들어서 전남 장흥의 천관산이라는 이름이 성립했다. 천관산의 형태가 탑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천관보살이 머리에 쓰고 있는 관의 모습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천관산을 다른 이름으로는 지제산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지제나 천관 등의 의미다. 인도에서 시바신의 화현으로 여겨졌던 아르나차라산이 중국 복건성으로 옮겨 지제산이 되어 다시 한국으로 옮겨가면 전라남도 장흥군의 천관산으로 재현된 셈이다. 아르나차라산의 손자에 해당한다고 말할까. 이 천관산에 천관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게 불교적 신앙심이다. 복과 지혜를 다하는 천관 보살 천관 보살은 어떤 주특기가 있는 보살인가? 복과 지혜를 모두 준다는 게 주특기다. 축복이 있으면 지혜가 부족할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지혜가 많은 사람은 축복이 적은 편이다. 사람이 머리가 좋으면 외롭지 않고 잘 풀 수 없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조금 어리석은 사람들이 잘 베풀어 훼손해도 보고, 그래서 나중에는 축복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복과 지혜는 함께 가지는 것은 사실 어렵다. 천관 보살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준다는 보살입니다. 강원도 고대산은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산이며, 금강산은 법기보살이다. 남해 보리암, 낙산사홍영암, 강화도 보문사는 관음보살이 머무르는 양이며, 타카창 성운 산성은사는 지장보살이다. 기도소로 유명한 대구팔공산의 갓암불은 약사여래라고도 하지만, 내가 보려면 머리에 사각형 관을 사용한 것을 보고 미륵 보살과도 같다. 장흥천관산의 천관사는 천관보살의 도량이다. 천관보살은 삼국시대에 유행한 보살신앙으로 보인다. 지금은 천관 보살이라는 이름이 낯설다. 잘 모르겠어요. 머리에 화려한 관을 쓴 이미지가 관음 보살과 겹친다. 천관보살신앙은 인도도 그렇습니다만, 복건성이나 전라남도 장흥의 천관산의 위치를 ​​보았을 때, 남지방에서 유행한 신앙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해도해로를 타고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해상불교 루트를 타고 전래된 불교다. 고대 고속도로가 해도다. 육로에서는 장거리 여행이 매우 어려웠다. 배를 타고 순풍에 돛을 붙이면 그대로 직행이다. 천관산은 이 고대 해상무역에서 하나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던 산이었다. 나침반과 이정표가 없었던 시대에 해안을 따라 큰 산을 보고 선원들은 “지금 우리가 어디에 오는지”라는 ​​감각을 포착했다.

 

[출처] :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 <조용헌 영지순례> 장흥천관산천관사(장흥천관산천관사) ▣ 장흥천관산, 정상에 수많은 기암괴석천자가 면류를 쓴 것처럼 … 후난의 5대 명산으로 평가… 117번째 국가 지정 문화재 명승 지정

 

천관산이 빠진 바위는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된 이유다. 장흥천관산(천관산 7m)이 부터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됐다. 1970년에 지정된 오대산 소금강이 명승 제1호. 문화재 지정 규모로는 총 133만3,013㎡(40만3,236평)로 여의도 면적의 3분의 1 조금 웃도는 수준이다. 문화재청이 밝힌 천관산의 명승 지정 이유는 ▲ 산등성이나 정상 부근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기암괴석 등의 화강암 지형 경관, 스스키 군락 등의 식생 경관, 꼭대기에서 바라볼 수 있는 다도 해경관 등 경관이 탁월하게 연출되어 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 백제·고려와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일대 행정구역의 중심이 되는 산에서 국가치마를 보내거나 분수를 설치하여 국방의 요충지로 활용된 역사성을 가지고 일대에 텐칸지, 탑산사 등 사검·암자와 방촌촌의 고택 등 문화관광자원이 다수 분포해 역사 요약하면 경관적·역사문화적 가치가 탁월해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으로 지정했다는 것이다.

 

마치 조경석처럼 정원 바위라고 이름 붙여진 바위. 조선시대에는 한양, 고려시대에는 개성에서 수백km 남쪽으로 떨어진 지방이 있는 도시가 역사적으로 인정되었을 때에는 강력한 호족세력의 기반이 있거나 그 기반에 의한 중앙과의 끈끈한 관계를 맺는 경우가 그렇다. 특히 고려왕건은 알려진 바와 같이 지방호족 세력의 반발을 무시하기 위해 정략결혼을 통해 유대 관계를 강화하는 정책을 짠다. 왕건은 지방호족의 딸과 29회의 결혼을 통해 6명의 왕후를 두고 나머지 23명은 후궁으로 했다. 왕건과 결혼하여 왕후나 후궁이 된 지방호족의 딸은 자연스럽게 출신지역을 취하고 중앙에서도 그 지역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다. 고려 이후 왕들도 어느 정도 정략결혼제도를 맺으면서 중앙과 지방관계를 유지한다.

 

덴칸지에서 남쪽으로 500보를 가면 작은 암자가 절벽 아래의 외진 곳에 있지만, 그것을 구정암이라고 부른다. 그 안에서 숭배를 따라 100개 이상의 들보를 오르면 돌 받침이 빵빵한 적이 있기 때문에 환희대라고 한다. 그것은 오르는 사람이 험한 길에 지친 몸을 여기서 쉬게 되기 때문에 즐겁고 기쁘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략) 기묘하고 기묘한 것이 많습니다만, 수다, 익은 것, 침묵하는 것, 입을 열었던 것, 일어선 것, 숨어 흘러넘친 것, 희미한 것 등이, 천태 만상 기괴로 이상할 수 없습니다. 왜 조물주가 여기에 정수를 모아 바다를 한계로 넘어 도망치지 않게 한 것은 아닐까.

 

천관산 정상에 옛 기근제를 보낸 제단을 그대로 재현했다. 마지막 경관적 가치는 호남의 5대 명산이라는 점이다. 호남의 5대 명산의 유래는 조선성종 때 문인성임(성임: )이 내장산을 방문해 남긴 기록 <정헬기>에 따라다. 정헬은 내장산 내장사 앞에 있는 누각의 이름. 여기에 남원 지이산, 영암월 출산, 장흥천관산, 부안릉가산(변산)이 있다. 정읍 내장산도 그 중 하나다”고 나온다. 이를 <신증동국 여지승람>에서 그대로 인용해 호남의 5대 명산으로 불리게 됐다. 덴세키야마는 봄이라면 진달래 능선으로 유명하다. 정상 연대봉에서 장천재로 내리는 능선 전체가 진달래 꽃으로 덮인다. 년 핑크 바다를 연상시킨다. 또 가을에 정상 일대는 일관되게 건너뜁니다. 기암과 어울리는 만추의 참새는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뿐만 아니라 정상을 내려다보는 난카이의 석양은 환상적인 석양으로 변한다. 봄의 진달래, 여름의 계곡과 바다, 가을의 참새와 기암, 겨울의 일몰은 덴칸산이 명승으로 지정되어도 남을 충분한 가치를 갖게 한다. [출처] : 박정원 월간산 선임기자: [‘한국의 명승’ 명산①] 천관산, 정상에 수많은 기암괴석 천자가 국류 쓴 것처럼… /월간산, 호

 

장흥천관산에는 기묘한 형상의 바위가 마치 천자, 즉 황제의 면류처럼 명명되었다고 전한다.

 

다도해와 기암이 조화를 이루는 절경

 

천관산 꼭대기의 바삭바삭 능선과 기암과 다도해가 합쳐 진척을 이룬다

 

장훈 천관산은 봄에는 동백과 진달래, 가을에는 스스키가 기암과 다도해가 합쳐져 ​​절경이 된다 장흥천관사(장흥천관사)

 

장흥천관산연봉과 덴칸지

 

새롭게 복원된 대웅전과 범종각 뒤에 대웅전과 덴칸지의 3층 석탑이 보인다 덴칸지 대웅전은 2015년 덴칸지 복원 계획에 맞춰 설계를 시작해 2016년 연말에 완성했다. 정면 3간 측면 2사이에 조선 초기의 건축 양식인 다포계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웅전과 오층석탑

 

보물 제795호 장흥 천관사 삼층석탑(张興天觀寺三層石塔)

 

3층 석탑의 탑 신부 멀리 천관산 정상의 괴암이 보인다 천관사는 신라진흥왕 때 통령이미지가 창건한 사원으로 천관보살을 모시고 천관사로 했다. 해변에 위치해, 왜구의 칩을 몇번 경험했기 때문에, 그 규모가 서서히 축소해, 현재는 천관 보살을 모시는 법당만이 남아 있다. 대웅전 앞의 이 탑은 2단 기단 위에 3층 탑신이 오른 고려시대의 탑이다. 탑신을 지지하고 있는 기단은 아래·상층 모두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본뜬 새겼다. 탑신은 각 층의 동체와 지붕석을 각각 하나의 돌로 쌓아 올려 층마다 동체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놓았다. 지붕석은 바닥면의 지주가 얇고 4단씩으로, 상면에 흐르는 경사가 아래로 내려갈 정도로 완만하고, 네 구석에서는 경쾌하게 오르고 세련된 인상을 준다. 탑 위에는 머리 장식으로 사각형 노반과 둥근 화분이 일석에 새겨져 올라가고 있다. 전체적으로 비례감이 적당히 안정감이 느껴져 단맛을 감돌게 한다. 기단 각면의 중앙기둥이 생략되어 지붕석의 지주가 얇아져 퇴화된 수법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을 통해 이 탑은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이다. 천관산은 지제산이라고도 불린다. 신라진흥왕 때 통령이미지가 보현사, 탑산사, 옥룡사 등 89암과 함께 창건해 천관보살을 모시고 사원명을 천관사로 했다.

 

9세기에는 덴칸지의 홍진대사가 추후 신무왕이 되는 김유후와의 관계가 높았다. 그러나 해변에 위치한 관계로 신라 말기부터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시대를 통해 왜구의 침입으로 점차 그 규모가 축소되었다. 1659년(효종 10)에 덴칸지의 역사를 담은 지제산사적을 전개하고, 그 전에도 1561년(명종 16)에 묘법연화경을 전개한 것을 비롯해 전부 13회나 경전 등을 간행했다. 1963년 한텍이 대웅전과 칠성당을 중건했지만 요즘 한때 세키야마지라고도 불렸다. 1986년에 도통이 중창하고, 1980년에 요사 2동을 세우고, 1991년에 범종각을 세워 오늘에 이른다. 현재 천관보살을 봉안했던 법정을 비롯해 삼성각, 범종각, 요사 등의 건물이 있다. 법정은 극악보전에 편액되어 있다. 정면 3 사이, 측면 2 사이의 극악보전은 건축 양식이 간결하고 지붕 선이 직선형으로 벽면 장식도 기교보다는 현실적으로 장식되어 소박함을 보이고 있으며 고려 시대의 간결미가 그대로 나타난다. 현존하는 유물로는 3층석탑이 보물 제79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돌 등이 전라남도 타입 문화재 제13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5층 석탑이 전라남도 타입 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중 석등은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높이 m의 고려 말기 작품이다.

 

전라남도 장흥군 간산읍에 위치한 천관사는 천관산 중복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애장왕 때 영통이미지가 세워진 사원이다. 현재는 송과사의 말이지만, 이전에는 화엄사의 시대, 무려 1,000여명의 승려가 모여 수도를 한 장소이지만,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해, 1963년에 극악보전을 재건해 덴칸지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텐칸지는 1960년대에 있는 스님이 극악보전을 세워 새로 사원의 면모를 갖췄지만 최근까지도 극악보전과 삼성각 요사채 등만으로 소박한 규모였지만 장흥군의 지원과 노력으로 대웅전 등을 새로 세워 장흥군을 대표하는 사원 보물 제795호로 지정된 3층 석탑, 전라남도형 문화재 제134호인 석등과 5층 석탑(135호)과 탑산사 절 석등(문화재 자료 196호) 및 많은 문화유적이 남아 있다. 천관산(723m)의 기암괴석과 스스키밭, 그리고 다도해의 풍경이 조화를 이루며 멋진 경치를 보여준다. 주변의 주요 관광지로는 수인사, 제암산, 천관산, 용하사, 만수사 등이 있다.

 

덴칸지는 천관산품 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원의 풍경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천관산은 해발 723m로 기암괴석과 동백나무가 유명하며 매년 봄이 되면 붉은 동백에 물든다. 또한 참조밭으로 유명한 덴칸산은 가을부터 겨울까지 덴칸산 전체를 덮고 경관이 매우 잘 방문하는 분들의 다리가 끊이지 않는다.

 

장흥 천관사 오층석탑(장흥 천관사 오층석탑)과 한약재

 

삼성 뿔 앞의 약수장 전라남도형 문화재 제135호의 덴칸지 오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기단이 1층으로 줄어들어 지붕석의 지지도 3단으로 줄어 통일신라의 석탑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문화재다. 높이 m. 전라남도형 문화재 제135호. 4장의 긴 긴 대석으로 지대를 구축하고, 그 중앙에 기단부를 놓았지만, 단층 기단에서 하대석은 호각형의 2단 덩어리이며, 그 위에 4장의 판석으로 면석을 짠, 각면에 양 우주[구석기둥]과 중앙에 갑석은 두꺼운 쪽으로, 밑면에 1단 괴임을 하고, 상면 중앙에도 1단 괴임을 각성해 탑신을 지지하고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 1석씩으로, 탑신 각면에 양우주를 새겼지만, 그 형식은 5층까지 같고, 옥개석의 계급 지주는 1층에서 5층까지 3단이다. 이 탑에서 특이한 형식은 지붕 돌이 매우 두꺼운 지붕 돌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지붕 돌채로 내려오는 전각의 반전도 심한 편으로, 이러한 현상도 고려하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계급 지주가 3단이면서도 그 단면이 매우 얕고, 비석이 전체적으로 보고 두껍고 평평하고 탑이 중후하게 보인다. 같은 경내에 있는 돌 등의 정제되고 균형 잡힌 조각기술과 3층석탑(보물 제795호)의 준수로 우아한 기법과는 판별한 형식을 보이고 있다. 이런 점 등에서 보면 조성연대는 고려대로 내려올 것 같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천관사5층석탑)

 

극악보전 원래 대웅전이었지만 1963년부터 극악보전으로 바뀌었다

 

삼성각 원래 칠성각이었지만 삼성각으로 바뀌었다

 

삼성 코너 내부의 칠성 탐파

 

삼성각 내부의 유독탄화

 

삼성각 내부의 산신탄화

 

안양료 뒷면의 장독대

 

안양료 향극악전 우측의 요사채 공양간에 사용된다

 

향극악보전 좌측의 요사채에는 「고로상반」과 「세심단」의 편액이 걸려 있다

 

39.미륵 신앙원조 진척율사가 선택한 금제 금산사

 

백제 패망 후 100년 정도 지나서 나타난 인물이 진척이다.

 

진척은 금강산에 가서 강원도 강릉지역 일대를 통과했지만 강을 건너면 다리가 없었다. 이때 성장해 무리가 엄청나게 나타나 다리가 됐다. 진척이 강을 건너는 것 같다. 진척이 땅바닥의 길을 건너자 그 지역의 사람들이 나와 머리카락을 잘라 길에 깔아 주었다. 추잡한 진흙을 밟지 않고 머리카락을 밟아가는 의도였다. 당시 사람들이 성자에 대한 최대한의 존경을 이렇게 표현한 것 같다. 교황청에서 깔린 카펫이 레드카펫이라고 들었다. 존경과 거룩함의 의미를 담고 있다. 영화제로 구성된 레드카펫도 로마교황청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대 서양에서는 빨간색이 매우 신성한 색이었습니다. 양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유령을 쫓는 색이다. 레드 카펫보다 1차원 높은 카펫이 머리카락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이 자신의 머리를 자르고 길의 끝에 깔고 어른이 지나가게 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굉장히 의미하는 곳이 크다. 진척은 머리카락 카펫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다. 얼마나 그 사람이 고결하고 얼마나 기운이 거룩하다면 그럴까. 일련의 삼국 유사은 내용의 대부분이 신라 중심의 콘텐츠에 해당한다. 일련이 경상도에서 태어나 그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삼국님에 백제지역 일화는 드물다. 그런데도 진척율사의 이야기는 2편도 소개되고 있다. 내용도 꽤 자세하다. 진척보다 무려 500년의 시간 격차를 두고 활동한 일련승이 자신과는 멀리 떨어진 전라도 근처의 진척율사 이야기를 삼국유사에 입전시킨 것은 그만큼 진척의 임팩트가 컸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Mac의 기운이 모인 곳 금산사는 김제모악산(793m)의 밑단 정기가 모여 있는 곳이다. 전체적으로는 흙이 많이 덮여 있는 육산이다. 지이산, 고대산과 같은 육산의 계보에 속하는 산이다. 그런데, 다케의 자가 붙어 있다. 악은 어려운 바위가 있는 산에 붙어 있는 이름이다. 설악산, 개성인 송악산, 원주 치악산, 월악산, 운악산, 관악산 등이다.

 

39. 백제유민으로부터 전라도 민초들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장소 김제 금산사

 

마상혈, 일명 맹봉이 정면에 금산사터를 보려면 방등 계단 위에서 봐야 한다. 정면에서 산봉우리를 바라보면 시든 봉우리의 형태가 마상구멍으로 보인다. 풍수가에서는 별명 ‘진봉봉’ 또는 ‘말체’라고 부르기도 한다. 둥근 봉우리 2개가 이어져 붙어 있지만, 하나는 크고, 하나는 조금 작은 피크가 줄지어 헤르페스한 모습이다. 이 모습이 말 안장의 모습과 같다. 그래서 이름에 말이 들어간다. 이 말상혈이 집이나 이웃 앞에 있으면 그 자리에서 높은 맹렬한 인물이 나온다고 믿는다. 이네스는 말을 타고 온다. 이처럼 보면 금산사에서 조계종단의 책임자인 총무원장도 두 사람도 배출됐다. 같은 사찰에서 총무원장 2명이 나온 것도 기록이다. 월주의 승려와 圓行의 승려다. 달의 주님의 제자가 원행이다. 사제 사이에 총무원장을 배출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문중이 가나야마데라 문중이다. 미륵전기는 오공혈(蚈穴)로 알려져 있다. 모악산에서 내려온 산줄기의 모습이 蚈蚣의 형태다. 지네는 전에 닭 봉우리가 없으면 격에 맞는다. 지네와 닭은 서로 마주하지 않으면 힘을 받는다. 그런데 금산사 미륵전 앞에 닭봉이 있다. 미륵전 앞에서 보이는 봉우리의 이름은 魄龍峰이다. 계류산도 있지만 금산사 앞에는 계류봉이 있다. 계류봉 아래로 내려가면 용화동이 있다. 왜정 때 후천개벽의 성지라고 믿던 공간이다. 금산사는 진척율사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백제에서 전라도에 이르기까지 압박된 민초들의 성지다. [출처] :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 <조용헌의 영지순례> 38. 김제금산사 백제유민으로부터 전라도 민초들이 메시아를 기다린 곳 40. 지이산 묘향암이 신선한 땅인 이유

 

한반도에서 이런 한국산이 가지는 편안함과 풍요로움을 대표하는 산이 지이산이라고 생각한다. 가로 40㎞, 세로 30㎞에 걸친 넓은 산악지대다. 1000m급의 피크만으로도 40여정이 될까. 더 좋은 점은 1000m 이상의 고지에서도 물이 나온다는 점이다. 질리산은 물이 많은 산입니다. 고지에서 물이 나오는 것은 동식물의 식생에 매우 유리한 점이다. 나무와 각종 식물이 우거져 식물이 우거져야 동물도 살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지이산은, 유인원 시대의 숲의 생활의 추억을 환기시켜 주는 산이라는 말이다. 깊은 충만을 주는 산이다. 이 책임감은 도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깊은 숲이 있고 땅에서 오르는 강력한 지기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깔끔한 토사가 나온다. 토사는 깊은 충만감을 맛봐야 하며, 항상 깊은 충만감에 사는 사람이 토사이기 때문이다. 질리산은 이런 산이다. 그래서 질리산은 역대 많은 신선이 배출되어 다른 산에서 공부해도 여기에 들어가 큰 공부를 성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선해졌다는 개운조사 지이산에서 수도였던 도사 중 대표적인 인물이 개운조사(개운조사·1790?)다. 출발은 불교의 스님이었지만, 도달한 경지는 신선하다.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다. 보통의 전설과 다른 것은 현재도 개운조사가 살고 있다고 믿는 열성적인 팔로워가 0명이 된다는 점이다. 1970년대 후반에도 지이산 근처 군부대의 책임자가 휘하의 병사들 수백 명을 풀어 개운조사의 수도를 찾으려고 수색까지 한 적도 있었다. 수도는 지이산 반야봉 아래에 있다는 금강굴이었다. 필자도 년에 개운조사 이야기를 듣고 그 흔적과 수행 방법을 추적해 왔다. 박사논문도 개운조사가 남겼다는 瑜伽心印楞嚴經을 들고 썼다. 밀교적 관점에서 불교의 노엄경을 해석한 책이지만 도교와 불교 그리고 요가 수행 체계가 서로 융합되어 통합된다는 밀교적 관점이 매우 매력적인 책이었기 때문이다. 핵심은 항복경심에 있었다. 마음을 항복한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화나지 않고 초조한 상태의 마음을 유지하지 않으면 신선한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에서 몸 속의 근원적인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다. 개운조사는 이를 대력 백우라고 표현한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에너지력이 매우 강해서 소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 강력한 흰소를 잡으면 수백 살이 사는 신선해지면 나온다. 경북 상주와 속리산 사이에 도카치지가 있다. 우복동이다. 소의 배처럼 편안한 장소에서 전쟁도 피해 굶주려 죽지 않는 한국인 유토피아다. 우복동 입구에 용류동 계곡이 있습니다. ‘동천(東天)’과 초서체로 새겨져 있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히가시카와 바위라고 부른다. 이 문장은 개운조사가 주먹으로 썼다고 한다. 도난당한 사람은 바위를 떡으로 부딪히도록 한다. 주먹으로 바위에 손을 대면, 무물물게 되어 문자를 쓸 수 있었다고 개운 조사가 쓴 책의 끝에 나온다. 이 히가시카와의 글자를 써 우복동 근처의 심원사에 계셨지만, 지이산 반야봉 아래에 수도처를 옮겼다. 1980년대 초반이었는가. 우복동 근처에 효창선원과 작은 목적지가 있었고, 여기에 개운조사의 제자였던 양성승려가 살고 있었다.

 

묘향암 입구의 석문, 이 돌의 틈새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지이산에 사라진 개운 조사 어느 날 효창 선원에게 개운조사가 왔다. 밥을 준 공양주 보살의 증언에 따르면 언덕길을 공중에서 날아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운조사가 양성에 “지이산에 가자”고 했지만, 오른쪽 샀던 양성은 “내가 속가의 딸에게 간다는 말만 말해 나갈 것”이라고 주저했다. 이 말을 듣고 개운조사는 “지금 보면 저녁의 석양이 한 명 정도 남아 있어 지이산에 충분히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공중을 나오도록 축지법을 사용해 남산에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공양주 보살의 목격담에 따르면 개운조사는 키가 그리 크지 않은 중배 정도의 체격에 양양목으로 만든 한복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연령은 40대 중반 정도 예쁜 얼굴이었다고 한다. 스승이 지이산에 가려고 하는데 주저해 티켓을 놓친 제자 양성은 100세를 좀 더 살아 돌아갔다. 양성은 일생 일대의 후회한 것이 이때 스승을 따라 지이산에 갈 수 없었다고 몇번이나 말했다. 이 양성이 후에 계룡산에 와 스승이 집필한 필사본 유가심인능엄경을 책으로 출판한다. 출판 비용을 함양의 박도사, 즉 이병철과 박태준의 장자방 역할을 한 제산 박재현이 부담했다. 필자도 이 계류산에서 출판한 책을 당시 입수할 수 있었다. 가쓰라야마 법원사에서 책을 전개할 때의 제목은 선불 진스알록(센불가 진수어 녹)이었다. 상저우 우복동에서 태양이 뉘뉘뉘질 때에 지이산으로 사라진 개운조사. 질리산 어디로 갔을까. 팔로워들에 따르면, 반야봉 아래의 묘향대와 금강굴이라고 한다. 그래서 많은 애호가들이 반야봉 아래를 찾으러 갔다. 이 중 묘향대는 현재 묘향암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금강굴이 어딘가는 도통불명이었던 것이다. 지이산 반야봉 일대에는 5대가 있다. 묘향대, 소번대, 니시야마다이, 무착대, 문수대 등이다. 질리산은 일부 봉우리 중에서 특히 반야봉을 중시했다. 이 일대에도 세는 정도의 명당이 많다는 뜻이다.

 

10여년 전 지이산 전문 산인들이 반야봉 아래를 제대로 찾아낸 박용발 비트는 해발 1300m의 자연 동굴이다. 6·25 전쟁을 전후, 지이산 일대에서 죽은 사람은 어느 정도일까. 어려서 4만명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2000년대 초, 지이산 생명평화운동을 할 때, 지이산에서 죽은 패치산과 군경토벌대의 위령제를 합동으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이때 양사자 가족의 위령제 신청을 받아보니 그 숫자가 4만 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지이산에서 20년 이상 살고 있는 치이산 시인 이원규(59)의 증언이다. 왜 때 보광당이 숨은 지리산 왜정 때 지치산에는 보광황이 숨어 있었다. 일제의 학병징용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다. 일본에서 대학을 통해 학병을 피해 질리산에 숨은 하준수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병주의 소설 치이산에도 나온 하준수는 당수도의 높은 단자이기도 했지만 함양의 3000석동 오두막 아들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광복 전에 일찍 질리산에 숨었다. 여러가지 이유로 광복 이전에 지이산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산 속에서 서로 알고 ‘보광당’을 결성했다. 이 보광당의 멤버들을 속칭 ‘구초치’라고 부른다. 반면 광복 이래 지리산에 들어온 파르티산은 신파치라고 한다. 지이산 박지상 총대장이던 이현상이 빗점골로 죽었다. 이현상 이후에도 박용발이 남아 있었다. 이현상보다는 카리스마가 조금 적었지만 나름대로 균일했던 박용발은 죽었다. 이현상이 죽은 뒤에도 약 6개월 이상 참아 죽은 것이다. 이 주제로 떠오르는 의문이 어떻게 6개월 이상 견딜 수 있었을까. 수만명의 군경토벌대가 이렇게 지이산을 늦었지만, 어떻게 그 수색으로 자신의 몸을 숨기고 잠들어 밥을 먹고 숨은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거의 기적과도 같다고 생각된다.

 

방해받지 않는 절대적인 안정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 이들 공간은 암굴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도 매우 난공불락의 위치에 위치한 동굴이어야 한다. 박용발의 조금은 이 조건에 매우 딱 맞는 위치에 있었다. 이 금강굴은 금강대라는 바위 언덕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다. 암굴을 나오면 금강대가 있어 이 금강대에 앉아 좌선을 하거나 밤에 달을 감상하고 놀기에 매우 적합한 장소였다. 그리고 금강대 앞을 영원봉을 비롯한 지이산의 많은 영봉이 싸여 있었다. 박치산 추적자는 개운조사의 길이 수행하는 전통을 알지 못했고, 개운조사 팔로워들은 파푸치산을 몰랐다. 드물게도 신선한 수행장과 패치산의 비트가 같은 장소였던 것이다. 인생의 큰 아이러니입니다. [출처] :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 <조용헌 영지순례> 41. 42. 전북 마이산 금당사

 

이 부분이 대승불교 특유의 사상이다. 평등 사상이다. 고대 신분제 사회에서 노예계급, 천민들도 불성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이것은 파격적인 생각이다.

 

킨도지의 정원에 연못이 있다. 바위가 많은 곳에는 물이 있어야 한다. 원효와 의상으로 이어진 열반방등경 「열반경」에 이 평등사상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 평등사상이 원효에게 계승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라타카의 저술중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반창종요가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가진 불성실을 6가지 점에서 논의하고 있다. 원효가가 열반 종결을 쓸 수 있었던 사상적 배경은 보덕 이미지에 배웠다고 생각한다. 선생님도 없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사상은 없다. 열반종의 대가인 보덕화상이 백제로 망명해 왔을 때 원효가 이곳에 와서 공부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시대 대패국사의 요시텐은 원효와 의상이 보덕화상에 열반방등경을 전수받았다고 했다. 요시텐 정도의 인물이 이런 이야기를 근거 없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지원도 보덕의 전기를 남겼다. 보덕이 당대와 그 이후 수백 년 동안 굉장한 사상가요타카카츠에서 인구로 회자됐다는 증거다. 원효가 말년에 무옥 노래를 부르면서 시장 밑을 돌며 민초들에게 불법을 말해 다녔던 것은 열반경의 빈부귀천 없이 모든 사람에게 부성이 있다는 평등사상이 바닥에 깔려 있어 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백제로 망명해 열반경 사상을 전파한 보덕화상의 문파는 그 후 어떻게 된 것인가. 보덕 이후 그 제자들이 곳곳에 절을 세운다. 대표적인 것이 계류산 신원사. 계류산에서 가장 암맥이 강하게 내려간 곳이 남쪽으로 간 지맥으로 여기에 신원사가 위치하고 있다. 문경의 대승사도 보덕의 제자가 지은 절이다. 모악산의 오하라지 역시 마찬가지다. 마이상 김당사는 보덕 이미지 이후 열반종의 중심사찰 역할을 한 것 같다. 우선 산세가 보통이 아니다. 마이산의 정기가 모인 지점에 머물렀다. 비래장이 있던 고덕산이 육산으로 산의 규모가 조금 작은 편이지만, 금당사가 정착한 흔적은 사방이 암봉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원이 바위봉에 둘러싸여 있으면 사방에서 깃발이 전해진다. 마치 압력밥솥으로 찐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사방암은 주변 피크가 너무 높아서는 안됩니다. 높으면 힘들다. 절을 누르십시오. 마치 감옥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당사적은 괴로운 느낌이 들 정도로 암봉들이 절을 누르지 않는다. 적당히 둘러싸면서도 압박감은 들리지 않는 곳에 절을 잡았다. 고단자의 와지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처럼 사방이 암봉으로 둘러싸인 것은 보통 수행장으로서 일급이다. 그러니까 보덕 이후 열반종의 본찰로서 기능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바위 옆에 연못이 있어야합니다. 김당사 법당에서 바라보면 전방 500m 전의 암봉 한가운데에 고금당이 있다. 고금당은 암굴이 중심이다. 보통 나영구르라고 한다. 고려 나연 대사가 이 동굴에서 열렸다. 나연 대사의 토굴가도 이 나옹글로 갔다가 나온 오드슨(길을 깨닫고 세운 선시)이기도 하다. 나옹글은 암벽 7부 능선경에 있는 자연동굴이다. 아마 이 바위 동굴에서 먼저 도인들이 수행을 하고 서서히 추종자가 되어 제자들이 오가게 되기 때문에 그 아래에 위치한 평평한 지점에 금당사를 세웠을 것이다. 김 당사자가 본찰이라면 나영구르(현재 고금당)는 초실 승려가 체재하는 장소가 되거나 혹은 혼자 수행을 강하게 밀어붙였을 때 체류한 특별한 수행장으로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왜 절의 이름을 금당으로 했는가? 오행으로 서쪽은 금의 방향에 해당한다. 동쪽은 나무이다. 김 당사자는 서쪽이다. 서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아미타도량이다. 불교에서는 서쪽에 극락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본당의 건물명이 극樂寶殿이다. 사이고가 되어 있는 불교법당은 극악보전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김당사는 사이고가 되어 있어 사명을 금당사였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한 문헌에서는 담으로 나와 있다. 담은 작은 연못을 가리킨다. 사원의 미륵전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바위 틈새로 흘러나온 물이 쌓인 연못이다. 여름에는 연꽃 잎이 가득합니다.金塘라는 이름은 이 연못에 의해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그 자리에 바위가 많은 경우에는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한다. 바위는 불입니다. 불만이 있으면 너무 건조하다. 물기가 없으면 촉촉하다. 그리고 금생수의 이론이 있다. 바위는 금입니다. 바위는 물을 만나면 그 기운이 조금 떨어진다. 기운이 적당히 빠져, 수기가 보충되어야 긴.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하고, 주변에 연못이나 시내가 감겨져 돌아야 한다. 김 당사 경내의 이 연못은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연못이 있는 것으로 김당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 김당이라고 명명해도 충분히 일리가 있어 과잉 표현이 아니다. 금처럼 귀중한 연못이다. 마이야마는 두 개의 암봉이 오행으로 보면 김체로 본다. 이씨 조선은 자신들을 나무로 보았다. 금극목(金克木)이다. 마이상은 이씨 왕조를 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름을 속금산이라고 불렀다. 금기를 묶어둔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성계는 마이상의 덕을 보았다는 점에서는 아이러니하다. 고려 말기에 마이산에서 멀지 않은 남원 근처의 황산으로 왜구를 크게 쓰러뜨렸다. 그 왜구와의 전투로 지형지물을 섬세하게 살려, 그 때 이 마이야마에 와서 기도를 올려 새로운 왕이 될 수 있는 금척을 꿈에 받았다고 한다. 금으로 만든 소나무 열매가 금지되어 있다. 이번에는 만물을 재고평가할 권력을 상징한다. 마이상은 거의 돈이 많이 들어가는 산이다. 그 금이 간 마이산의 중심에 금당사가 있다. [출처] :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 <조용헌의 영지순례> 42. 전북 마이상 금당사 이성계가 왕의 금척을 받은 곳, / 주간조선(제2672호), 43. 전남신안군 침태도 노만사 지중해 경치

 

법정 후에 흩어진 바위의 틈에서 새는 물. 「이슬이 가득한 절」이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암태도 농민들의 아사 동맹 암태도 사람들은 목포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했다. 첫 데모는 범선 7척으로 나눠 타고 온 400명이 주도했다. 그리고 암태도로 돌아왔지만 소작쟁의 주동 간부가 해방되지 않으면 두 번째로 다시 600명이 목포에 갔다. 이때 암태도 사람들은 아사동맹을 맺었다. 시위를 하고 굶어 죽어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도록 각오였다. 결국 목숨을 건 소작투쟁의 결과 소작료는 40%로 낮아졌다. 이것이 일제강점기 전국 소작쟁의 모델이 된 것이다. 암태도 사건이 신문보도를 통해 전국에 널리 알려진 결과였다. 동학농민혁명 실패 이후 거의 30년 만에 농민이 자발적으로 다시 일어나 투쟁에 성공한 결과였다. 암태도의 치열한 소작투쟁의 배경에는 암태도의 지세도 관련되어 있다. 바위가 많은 지형에서 배출되는 강인한 기질이다. 바위가 많으면 기질도 강해진다. 아사 동맹은 아무도 묶는 것이 아니다. 바위가 많은 지형인 이와타섬에서 가장 높은 산이 승봉산이다. 해발 356m. 승봉산의 7부 능선경에 노담사가 있었다. 이슬이 가득하다는 뜻이다. 절은 바위 절벽이 흐린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런 바위 절벽의 흔적을 보면 불교 사원이 세워지기 전에 이미 원주민들이 기도를 드린 것이 대부분이다. 원주민들이 기도를 바치고 영험한다고 알려진 곳에 불교 사원이 정착하는 경우가 많다. 법당 뒤에 흩어진 바위 틈 사이에 푸른 이끼가 끼여 있었다. 그 이끼 사이에 바위 틈새에서 새는 물이 한 방울씩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절을 지키고 있는 70대 중반의 노스님의 이야기에서는, 그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이슬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슬이 가득한 절이라는 말은 이 이끼의 틈에서 떨어지는 물 때문이었다. 한때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고 해서 섬 주민들이 노만사에 와서 이 물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마츠다케가 인간에게 많은 메시지를 준다. [출처] : 조용헌 강호 동양학자 : <조용헌 영지순례> 43. 전남신안군 이와타시마 노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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